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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소방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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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의 및 변천

의용소방대 인원현황

소방 현장활동이나 홍보활동 등에 있어서 의용소방대의 역할은 대표적인 자원봉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자원봉사활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종교, 민주주의,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정신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가족들 서로 간에, 이웃 간에, 집단 간에 인류의 출현과 삶의 역사 가운데 태동하여 활동하여 왔으며 인류문명의 급속한 발전 즉, 산업화 도시화로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원봉사의 의미는 의지(will)와 욕망(desire)을 나타내는 Voluntus에서 기원한다. 이것을 Voluntarism이라 하고 라틴용어로 Voluntas라 한다. 이러한 용어에 근거해서 자원봉사자란 Voluntas(자유의지)와 eer(사람)의 복합어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강제 받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자원봉사는 법적의무가 아닌 자유의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연대감의 하나이다. 또한 자원봉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의 사람만이 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영역과 대상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자원봉사의 특징으로는 사회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자발성, 공익성, 무보수성을 들 수 있다. 이 중 자발성은 평등한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누구에게 명령을 받거나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익성은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며, 무보수성은 보수에 대한 기대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원봉사는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라 타인과 사회를 위하여 무보수로 일한다는 기본정신위에 계획성과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우연히 한 행동이 아니라 의도되고 계획된 활동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용소방조직의 사회적 의의

의용소방대의 활동이 가지는 사회적 의의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현대사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집단 및 기관들이 증가하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욕구충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재정과 인력의 부족이 그 원인중의 하나인데, 의용소방대의 활동은 이러한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의의를 갖는다.
둘째, 의용소방대의 활동은 자발성에서 우러나온 민간활동이고, 활동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의식을 높이는 것이므로 시민참여의 한 형태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셋째, 우리사회도 국민소득의 증대와 기술문명에 의함 노동력의 대치로 많은 여가를 누리게 되었다. 여가는 그 사용에 따라서 건설적이고 긍정적일 수 있는 한편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여가를 의용소방대의 활동에 활용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긍정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사회복지에 기여하게 되며 여가를 활용하여 발생할 수 있는 파괴적 요소를 예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용소방조직의 변천

의용금화조직의 형성

조선왕조 세종 8년이 1426년 2월경 한성부내에서 화재가 연속으로 발생하였으며, 같은 달 15일에는 한성부 남쪽의 인순부에서 불이나 인가 2,170여호와 32명의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대화재가 있었다. 이 화재를 계기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금화관서인 금화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상비 소방제도로서의 관서는 아니지만 화재를 방비하는 목적으로 독자적인 기구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당시 불을 끄는 일은 관원들의 지휘로 군인, 노비, 백성에 의하여 이루어 졌는데 금화도감이 설치되기 전에 관공서의 화재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이 정하여져 있었고 금화도감이 설치된 이후에는 관공서뿐만 아니라 민가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금화군제도와 5가작통제도가 실시되었으며 금화도감이 없어진 이후에도 이 금화군조직은 감화군조직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이후 없어지게 되었다.
세종 19년인 1437년에 전국적으로 흉년이 돌자 도둑이 성행하였다. 이때 충청감사가 각 고을의 젊고 건강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순찰을 돌며 도적과 화재를 예방하자는 건의와 경상감사의 주청에 따라 고을별로 제대한 군인 등으로 자율적으로 도둑과 화재로부터 마을을 지키도록 허용함에 따라 지방의용금화조직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함 경방조직은 각 이ㆍ 동에 재난이 발생하면 이ㆍ 동의 청장년들이 모여서 방재활동을 함으로써 오늘날의 의용소방대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소방조

구한말 문호가 개방되면서 각 개항지에는 인본인 거류자의 수가 늘어나고 왕래가 잦아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거류지구내의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소방활동을 위하여 의용소방조를 설치하기 시작하였으며, 경성의 경우 1889년 2월 소방펌프차 1대를 배치하여 소방조를 운영한 것이 한국내 소방조의 최초이다. 이어 1890년대와 1900년대 초까지 각 개항지 영사관규칙으로 소방조규칙이 제정, 시행되었고 관민으로부터 갹출금을 거두어 수갑(手押)펌프를 구입하고 소방조원들에게 출동수당을 지급하였다.
1906년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각 개항지에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면서 경성의 경우 이사청령 제1호로 경성소방조규칙을 제정 시행하였고 이어 원산, 부산, 평양, 목포 등에서 종전에 시행하던 영사관규칙을 폐지하고 새로이 이사청령으로 소방조규칙을 제정 시행하였다. 이사청령에 의하여 설치된 소방조 외에 자발적인 조직까지 생겨 그 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한국인 사회에서도 소방조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소방조 조직은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나왔으며 침략전쟁을 펴기 위한 수단으로 일제의 비호아래 전국 각지에서 계속 조직되어 1914년 말에는 635개 소방조에 조원수 56,567명에 달하게 되었다.1915년 6월 23일에는 소방조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기본법규인 소방조규칙을 조선총독부령 제65호로 제정 공포하고 동년 8월 1일부터 시행토록 하였다.소방조의 설치는 원칙적으로 부 또는 읍.면지역에 의하되 필요한 경우 토지의 상황과 기타 특별한 사정에 따라 부.읍.면지역내에 적당히 구역을 정하여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에는 소방조의 수가 68개에 불과하던 것이 소방조를 경방단으로 통합하기 전해인 1938년에는 1,398개의 소방조에 인원은 69,411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당시 소방조에 대한 급여는 연봉과 월봉이 있었고, 수당으로는 출장수당, 비상소집수당, 비번근무수당, 당직수당, 소화전조사수당 및 기타 피복비, 부상 또는 발병자에 대한 치료비가 있었다.


경방단

일본은 중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1937년 11월 18일 방공법조선시행령을 제종 공포하였다. 이어 1939년 7월 3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04호로 방공법규칙을 제정 공포하고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하여 경방단으로 통합하기로 하여 구한말이래 조직되어 왔던 소방조는 제도상으로 모습을 감추고 새로운 경방단조직으로 소방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방단의 설치구역은 부.읍.면구성단위로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소방조직의 설치구역과 같으며 경방단원은 지원형식에 의하되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자로서 실제 활동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발하도록 하였으며 경방단 소방부의 임무는 경찰서장 또는 소방서장의 지휘를 받아 평시에 있어서는 수.화재, 전시에 있어서는 공습에 의한 화재를 경계 방위하여 이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는데 있다.


소방대

일제는 중.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1937년 11월 18일 방공법 조선시행령을 제정.공포하였다. 이어 1939年 7月 3日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04호로 경방단규칙을 제정.공포하고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해 경방단으로 통합하여 도지사 감독하에 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방단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구한말 이래 조직되어 왔던 소방조는 제도상으로 모습을 감추고 새로운 경방단조직으로 소방활동을 하게 되었다. 종래 경찰의 통제하에 속해 있던 소방대 및 수방단과 부,읍,면 계통의 방호단을 해체통합하여 새로이 도지사 감독하에 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방단을 설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일제의 통치가 종결되자 경방단은 자동적으로 해체되어 다시 소방대가 조직되었다. 정부수립 후, 소방대는 소방업무 뿐만 아니라 전후 복구사업 등 정부시책에 적극 협조하여 활동을 벌여 왔으나, 1952년 8월 방공단규칙 제정을 계기로 소방조는 방공단에 흡수되었다. 1953년 7월에는 민병대를 조직케 됨으로써 방공단을 포함한 각종 청년단체가 해산되어 잠시 동안 민간 자체소방조직이 전무하였다.그러나 의용소방대의 필요성이 재인식되어 1954년 1월에는 전국적으로 의용소방대를 재조직하기에 이르렀으며, 1958년 3월 11일 법률 제485호로 소방법 제정시 소방법에 의용소방대설치에관한규정을 마련한 것을 계기로 그 후 계속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의용소방대는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수차례의 제도적 변천 속에서도 계속 존속하게 된 것은 아직까지 상비소방조직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도 기인한 것이지만 이보다도 우리 국민들이 여러 차례의 시련을 극복하여 오는 과정에서 터득한 자위정신의 발로라 하겠다.경방단을 해체하여 소방대를 조직하였을 때에는 그 조직과 운영에 관하여는 관례에 의하여 오다가 뒤에 소방대규칙을 시.도의 규칙으로 제정하였는데, 이 소방대규칙은 일본강점기시대의 소방조규칙을 채용한 것으로 도지사는 수재.화재를 경계 방어하기 위하여 직권 또는 경찰서장, 소방서장의 신청에 의하여 시.읍.면별로 1개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소방대는 대장.부대장.부장.반장.대원으로 조직하되 대장.부대장은 경찰서장 또는 소방서장의 추천에 의하여 도지사가 임명하고 부장이하의 대원은 경찰서장 또는 소방서장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소방대의 기구로는 감찰부, 서무반, 소방반, 펌프반, 파괴반, 경계반, 구호반을 두고 대의 정원은 시 지역은 150명, 읍.군청 소재지는 90명, 기타 면지역은 60명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도지사는 경찰서장 또는 소방서장으로 하여금 소방대에 대하여 매년 1회 이상 검열을 실시하도록 하고, 대원은 치안국장이 정한 복제의 복장을 착용하도록 하며(지역에 따라서는 제복을 정하지 않을 수 있음) 모범대원에 대하여는 표창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대원 출동수당에 관하여는 동 규칙이 시행되기 전부터 지역별 훈령으로 정하였는데 1950년 3월 14일 서울시 훈령으로 정한 출동수당은 1회 100원이었다.
한편 시.도 훈령(서울시에 있어서는 1949년 11월 12일 시달)으로 대장 및 부대장을 회원으로 하는 의용소방대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대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협의 연락토록 하였고 1954년 의용소방대 재조직후에는 지역에 따라 구성.활용하게 되었다.


방공단

6. 25 사변을 겪는 과정에서 방공(防空)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정부는 1951년 3월 22일 법률 제183호로 "방공법"을 제정하고 이어 동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681호로 방공단규칙을 제정하였다. 방공단은 구.시.읍.면단위로 설치하되 동, 리에 분단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방공단에는 총무, 감시, 방호, 소방의 4부를 두고 경찰서장이 지휘하되 소방에 관하여는 소방서장이 지휘하도록 하였다.소방부에는 정비반과 소방반을 두어 정비반은 소방설비 기재의 정비와 감찰을 담당하며, 소방반은 화재의 예방과 진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한편, 1952년 2월 9일에는 대통령령 제606호로 직장방공단규칙을 제정하여 지정된 장소에서는 직장방공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방공단에서는 방호부, 구호부, 훈련부를 두고 방호부내에 소방반을 설치하도록 하였다.1953년 7월 23일에는 대통령령 제813호로 민병대령을 제정하여 귀휴병, 예비병, 보충병 및 국민병으로 민병대를 조직하고 생계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아 향토방위에 협조토록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각 청년단체를 해산토록하여 방공단규칙이 동년 10월 7일 대통령령 제826호로 폐지됨에 따라 잠시 방공조직의 공백상태를 가져왔다.


last updated 2017.05.23